목양칼럼 8 페이지


  • Rohthem 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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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18개의 글이 있습니다.
  • 76
    복음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청춘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청년입니다 65세를 노년으로 구분하는 것은 1956년 UN에서 발표한 자료를 근거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한때 인터넷에서는 UN에서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한바탕 떠들썩했던 적이 있었구요. 그 새로운 기준에 따르면, 1-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그리고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으로 구분되었답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저는 아직 청년인 셈입니다! 이 소식이 많은 사람을 기쁘게 했지만, 사실 UN에서 그런 발표를 한 적이 없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결국 인터넷 루머였던 것입니다. 근거 없는 정보가 이렇게 전 세계로 퍼진 걸 보면, 아마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청년’으로 남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노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 이제는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령화 사회는 인구 중 65세 이상이 7% 이상일 때를 말합니다. 65세 이상이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라고 합니다. 한국은 2024년 기준으로 65세 이상의 인구가 19.2%에 달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2022년 기준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17% 정도라고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선교회 나이 구분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에 조사해 보니 65세 이하 성도가 약 195명(EC와 교육부 포함)이고, 65세 이상은 216명으로, 65세 이상이 전체의 52%를 차지합니다. 초초초고령 공동체라 할 수 있겠죠. 그나마 저희 교회는 EC와 교육부까지 합하면 80-90명 정도의 젊은 세대가 있어서 나은 편입니다. 나이를 구분하는 것은 생물학적 연령뿐만 아니라 주관적 연령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게 느끼고, 나이가 들수록 더 젊어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어떤 분은 청년과 노년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과거를 자꾸 이야기하는 사람은 노년이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청년이라고요.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스스로 청년이라고 생각해도, ‘왕년’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은 노년일 것입니다. 반면에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사람은 진정한 청년이라 할 수 있겠죠.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그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사람은 영원한 청년과 같은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과거의 향수에 젖어 사는 사람은 신앙의 노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현재가 힘들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약속합니다. 그 종말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청년입니다. 2024년 10월 27일 박일룡 목사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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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
    받은 복을 세어볼 때, 주의 크신 복을 알게 됩니다
    받은 복을 세어볼 때, 주의 크신 복을 알게 됩니다. 멀린 케로더스 목사의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은 35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천만 부 이상 판매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짐이라는 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짐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가족들은 30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지만,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짐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짐은 깨달았습니다. "그래, 나는 그동안 아버지가 변하기만을 바랐지, 감사한 적은 없었구나." 비록 그의 삶은 감사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짐은 감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술을 마셔도 주정이 심하지 않아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술을 마셔도 길에서 쓰러지지 않는 것도 감사했고, 30년 전보다 지금은 덜 마시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결국, 짐의 삶에는 기쁨이 회복되었고,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라"고 노래합니다. 요한은 천국의 모습을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곳"으로 묘사합니다(계 5:13). 천국은 분명히 감사가 넘치는 곳일 것이고, 감사는 천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감사가 넘칠 때,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감사가 넘치면 천국이 임하고, 감사가 넘치는 가정에는 천국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교회는 더 많이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이미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종종 우리가 없는 것에만 눈과 마음이 집중되어 감사할 조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염려와 걱정은 저절로 생겨나지만, 감사는 의도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면" 주께서 주신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감사의 시즌입니다. 올해도 하나님이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포도원 모임에서 감사 조건을 나누자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힘든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고, 기쁨을 얻으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볼 때, 주의 크신 복을 우리가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2024년 10월 20일 박일룡 목사
    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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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4
    한 번에 1mm 씩
    한 번에 1 mm씩지난 주 저는 재미고신 총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많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사모님들, 장로님들이 함께 모여 회무처리를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들과의 대화는 결국 건강 이야기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저 역시 경미한 무릎 관절염과 허리 통증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하는 친구 목사님들도 중년에 접어들다 보니 각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더군요. 한 친구는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좋아하던 테니스도 이제는 라켓을 들 수 없어 한동안 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스테로이드 주사로 버티고 있지만, 호전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또 다른 선배 목사님은 척추 부상으로 허리 통증이 심해 운동을 못한 결과 체중이 늘고, 당뇨도 생겼다고 합니다. 건강을 위해 다른 운동은 힘들어 요가를 시작하셨는데, 요가가 허리 통증 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굳은 몸이 스트레칭을 잘 따라주지 않아 힘들었지만, 요가 선생님께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하루에 1mm씩만 늘린다는 마음으로 하라"고 조언해 주셨답니다.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1cm, 2cm, 3cm씩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저 역시 운동을 할 때 몇 번 강하게 하면 곧바로 근육이 생기고 몸이 좋아질 것이라는 조급한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근육통이 생기고, 결국 오래 운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번 대화를 통해서 저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은,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영적인 변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 말의 태도, 생각의 방향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변화 시도가 무리를 일으키고, 결국 통증을 겪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삶이 변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영적인 성숙과 변화의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1mm씩,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이루어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삶도 변화되고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2024년 10월 13일 박일룡 목사
    202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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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건강한 밥상 공동체를 꿈꾸며
    건강한 밥상 공동체를 꿈꾸며한국 사람들에게 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와 연결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인사말에도 밥이 자주 등장하죠. 어른들은 “밥은 먹고 다니냐”라며 안부를 묻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합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나 밥 안 먹어”라고 말하기도 하고, 화가 나면 “넌 국물도 없다”는 말로 엄포를 놓기도 하죠. 부탁을 할 때는 “도와주면 밥 한 번 살게”라고 하고,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맛 없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한심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저래서 밥이나 벌어 먹겠냐”고 비꼬기도 하고요. 반대로 비아냥거릴 때는 “밥만 잘 먹더라”고 하기도 하고, 제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에게는 “제 밥그릇도 못 챙긴다”고 타박하기도 하죠. 피곤해서 자겠다고 할 때도 “밥 먹고 자라”는 말은 빠지지 않습니다.지난달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식탁의 교제가 많았습니다. 포도원지기 워크숍에서는 포도원지기들과 그 아내들, 부지기들, 그리고 이전 지기들까지 함께 모여 세미나를 하고 식사를 나누며 교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여선교회 연합 수련회에서도 그동안 한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할 기회가 없었던 1여선교회부터 5여선교회 회원들이 함께 앉아 먹고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고, 참 행복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배위원회 전체 모임도 있었습니다. 모두 함께 게임을 하며 웃고, 음식을 나누며 한 가족 같은 기쁨을 느꼈습니다.우리는 이런 교제를 ‘밥상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밥상은 밥과 반찬을 차려 놓은 상이고, 공동체는 이익을 추구하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연대하는 기본 정신을 지닌 모임입니다.예수님도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고, 세리와 죄인들과도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잔치집으로 비유하시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가 문을 열고 영접하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이제 가을, 추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 가을에 서로 함께 먹고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한 솥 밥을 먹는 사람을 우리는 ‘식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로 자라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앗, 이러다가 앞으로 “목사님, 밥 한번 사세요”라는 말이 자주 듣게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2024년 10월 6일 박일룡 목사
    202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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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믿음은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는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아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엄마, 바깥은 너무 캄캄해서 무서워요." 엄마는 아이를 달래며 말했습니다."얘야, 예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시잖니? 지금 밖에도 예수님이 계셔. 널 지켜 주실 거야." 아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로 되물었습니다."진짜 예수님이 밖에 계신다고요?" 엄마는 다정하게 대답했습니다."그럼, 예수님은 어디든지 계셔. 네가 혼자 있을 때에도 언제나 네 곁에서 널 지켜 주신단다." 엄마의 말에 아이는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우리도 때때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고 믿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마치 문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만을 기다리는 이 아이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으로 고난을 맞서지 못하고, 그저 안전한 곳에 머무르려 합니다. 혹시 지금 우리도 그러한 모습은 아닌가요?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을 신뢰하고 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1). 믿음은 단순히 내 마음과 생각에서 일어나는 확신을 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선택하며 걸어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더 나은 영원한 소유'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아무 방향도 없이 방황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히브리서 4:16). 오늘 우리는 안전지대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며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그 나라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말입니다. 2024년 9월 29일 박일룡 목사  
    202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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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에 대한 표현에 대해 우리는 가끔 고민하게 됩니다. 특히 "예배를 본다"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거나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어학적으로 보면, 이 표현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예배를 본다"에서 "보다"라는 단어가 단순히 '구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잔치에 갈 때도 "잔치 보러 간다"라고 표현하고, 초상집에 갈 때 "상주 보러 간다"라고 말하듯, '본다'는 말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참여하고', '마음을 다해 살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장보러 간다’고 할 때에도 단지 시장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보다는 “예배하다”란 말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배하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드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예배는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표현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예배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어합니다. 감동을 받거나, 기쁨을 느끼고, 위로를 기대합니다. 예배 중에 이러한 것들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 예배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관객이 아닙니다. 또한 예배는 내가 받는 서비스가 아닙니다. 예배의 성공 여부는 내가 얼마나 감동받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셨는가입니다. 내가 감동을 받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세에 실망하셨다면 그 예배는 실패한 예배일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든 일상의 예배든,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그로 인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예배할 때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립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2024년 9월 22일 박일룡 목사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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