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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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67개의 글이 있습니다.
  • 149
    고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입니다
    고난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입니다 목회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불치의 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성도들, 그리고 삶의 깊은 어려움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제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온누리교회의 고 하용조 목사님은 일곱 차례의 간암 수술과 매주 네 번의 신장 투석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사역을 감당하시다가 6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할 때 세 가지를 기억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첫째, 상황을 받아들이라.둘째, 인내하라.셋째, 감사하라. 엘리자베스 쿠블러-로스 박사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보이는 다섯 단계의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충격과 부정(shock and denial), 둘째는 분노(anger), 셋째는 흥정(bargaining), 넷째는 우울(depression), 마지막은 받아들임(acceptance)입니다. 이 과정에서도 마지막 단계가 받아들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아마도 가장 힘든 것이 “받아 들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닙니다.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가장 깊은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권적인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것처럼, 지금의 고통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연단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를 보게 합니다. 고통은 사람을 가장 겸손하게 만들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의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그러나 분명히 믿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심을 믿고, 그의 선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우리가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얻게 될 것입니다. 2026년 3월 29일박일룡 목사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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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8
    우물 안 개구리의 진정성을 넘어야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진정성을 넘어야 합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입니다. 우물 속에 사는 개구리는 하늘을 본다고 해도 우물 입구만큼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만큼이라고 생각합니다. 식견이 좁아 넓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성’이라는 말로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성이 객관적인 진리를 붙들지 못하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 되고, 신념이 아니라 편협한 이기주의가 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더 넓은 시각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의 이념이나 좌우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보게 합니다. 성경은 인간 안에 있는 죄성과 악함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인간 안에 선함의 흔적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간의 제도와 생각에는 죄성과 선함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쪽이 절대 선이고, 다른 사람은 절대 악인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균형 잡힌 눈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붙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욕심을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작은 우물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내 것을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붙잡는 삶이 아니라 내어 주는 삶, 자기 중심의 길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길을 따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시야는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를 붙드는 삶이 아니라 나를 내어 주는 삶을 배울 때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26년 3월 22일박일룡 목사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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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과거의 유리벽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라
    과거의 유리벽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라심리학에서 종종 소개되는 이야기 가운데 “파이크 증후군(Pike Syndrom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장애물이 사라졌는데도 과거의 경험 때문에 스스로 가능성을 포기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파이크(pike)는 육식성 물고기인데, 실험에서 큰 수조에 파이크와 작은 물고기들을 함께 넣고 그 사이에 투명한 유리벽을 설치했습니다. 파이크는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려고 계속 돌진했지만 매번 유리벽에 부딪혔습니다. 여러 번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그 후 연구자는 유리벽을 제거했습니다. 이제 아무 방해도 없이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파이크는 더 이상 작은 물고기들에게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먹이가 있었지만, 그대로 굶어 죽어갑니다. 과거의 실패 경험 때문에 “어차피 안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모습이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 실수했던 기억,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안 될 거야.” “나는 이미 실패한 사람이야.”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없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가 마지막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실수보다 훨씬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넘어졌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일어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실패로 우리를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여십니다. 때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실제 장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유리벽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안 된다”는 생각, “이미 늦었다”는 체념이 우리를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과거의 실수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주님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십니다. 2026년 3월 15일박일룡 목사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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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6
    마음이 무너질 때 붙들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 붙들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던 일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갈 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낙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약의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숨어 있다가 갈멜산에서 놀라운 이적과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위협은 여전했고, 상황은 나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광야 로뎀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사실 낙심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기대했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엘리야를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어 물과 떡을 먹이시고, 그를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난 속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이는 들어가고, 몸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상황은 쉽게 좋아질 기미가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이 고난이 끝까지 이어질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믿음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 땅의 모든 고난에서 우리를 쉬게 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은 믿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무너질 때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나는 다 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고백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마음이 무너질 때, 붙들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그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2026년 3월 8일박일룡 목사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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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5
    유레카 보다 큰 기쁨-주님을 만나는 기쁨
    유레카 보다 큰 기쁨-주님을 만나는 기쁨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금광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유레카(Eureka)!”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이 말은 “내가 발견했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유명한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왕은 금세공업자에게 순금을 주고 금관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금관이 정말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자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그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몸을 물에 담그다가 물이 넘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물체의 밀도에 따라 부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면, 같은 무게의 순금과 비교할 때 부피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원리를 통해 진위를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는 벌거벗은 채 욕탕 밖으로 뛰어나가며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중가주 레이크 타호 인근에서 눈사태가 발생해 15명이 조난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6명은 구조되었고 9명은 실종 상태였습니다. 구조된 사람들은 아이폰의 긴급 SOS 기능 덕분에 위치가 파악되어 구조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조대를 만났을 때의 기쁨, 그리고 조난자를 찾아낸 구조대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여러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만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귀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참된 기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영적 어둠 가운데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요 9:41). 우리 역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읽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주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불편하더라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눈을 씻고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상처와 고통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발견보다 큰 기쁨, 곧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26년 3월 1일박일룡 목사
    202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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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4
    말에나 일에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삽시다
    말에나 일에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삽시다 한 철학자가 어떤 연유로 도둑과 함께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도둑이 철학자에게 탈옥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어두운 그믐밤을 틈타 몰래 감옥을 빠져나왔습니다. 지붕 위를 살금살금 기어가던 중 도둑이 발을 잘못 디뎌 기와장을 떨어뜨렸습니다. 기왓장 소리를 들은 교도관이 “거기 누구야!”라고 소리치자, 도둑은 재빨리 “야옹!” 하고 고양이 소리를 냈고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철학자가 발을 헛디뎌 기와장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교도관이 “거기 누구야!”라고 외쳤습니다. 당황한 철학자는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고양이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머 같지만 분명한 교훈을 전해 줍니다. 고양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고양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양이처럼 행동하고 고양이의 소리를 내야 고양이로 여겨집니다. 우리도 때로 말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가치를 추구합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말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삶으로 드러날 때에만 진정성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 고양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자기기만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의 본질과 성도의 사명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이래야 한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지도자는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주장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합당한 삶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예배 시간의 감동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갈 때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을 추구하고,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듯 우리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그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골 3:17).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예배자의 경건이 조금씩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이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6년 2월 22일박일룡 목사
    202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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