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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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67개의 글이 있습니다.
  • 155
    우리는 이미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남북전쟁 중 중요한 결전을 앞둔 어느 날, 참모들이 Abraham Lincoln 대통령에게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짧은 말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복을 받을 사람”이 되기보다는 “복만 받으려는 사람”이 될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힘과 권력을 누리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편에 서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며,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을 받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달라져야 합니다. 복을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주신 그 복에 감사하며, 그 복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6년 5월 10일박일룡 목사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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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가 아니라 본향을 소망하는 자로 삽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가 아니라 본향을 소망하는 자로 삽시다. 영어에 hom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주 쉬운 단어 같지만, 막상 번역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Home은 단순한 ‘집’(house)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family)만으로도 다 담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을 home이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는 건물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수병’을 말할 때 house-sickness라고 하지 않고 homesickness라고 합니다. 고향을 말할 때도 hometown, homeland라고 하고, 모교를 다시 찾는 것도 homecoming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home은 가정을 넘어, 우리가 속했던 자리와 기억, 따뜻함과 친숙함, 그리고 그리움을 함께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고향과 고국을 떠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삶이 지칠수록 고향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향 교회와 고국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그곳에 따뜻함과 편안함, 그리고 정다운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 땅의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집을 짓고 살아가는 데만 마음을 두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히 11:16). 그 본향은 우리가 떠나온 고향이 아닙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우리의 영원한 본향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곳을 생각할 때 위로를 얻습니다. 그곳은 분명 고향보다 더 따뜻하고, 더 친밀하며, 더 기쁨이 넘치는 곳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길이 멀게 느껴질지라도, 그 본향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그곳은 단순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붙드는 소망의 자리입니다. 2026년 5월 3일박일룡 목사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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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3
    가장 먼 여행, 그리고 돌아갈 본향
    가장 먼 여행, 그리고 돌아갈 본향 인류가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꿈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 상상력에 불을 지핀 대표적인 작품이 1960년대에 시작된 SF 시리즈 ‘스타트렉’입니다. 이 시리즈의 유명한 오프닝 나레이션은 인간의 갈망을 잘 보여줍니다.“인류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대담하게 탐험하는 것” (To boldly go where no man has gone before) 최근 다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에는 일론 머스크의 영향이 큽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우주를 동경하며, 화성에 가서 살겠다는 꿈을 품어 왔고, 이를 위해 스페이스X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화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를 여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국은 다시 달 탐사를 추진하고 있으며, 그 준비 단계로 아르테미스 2호를 발사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습니다. 이 임무에 참여한 우주인들은 인류 역사상 지구에서 가장 먼 거리까지 나아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고 회상합니다. 스타트렉이 시작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인류가 실제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여전히 달의 뒷면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주는 광대하고, 인간의 발걸음은 아직 제한적입니다. 태양계를 넘어서는 우주 여행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멀리 떠날수록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르테미스 2호의 우주인들 역시 임무를 마친 후 지구로 돌아와 가족들과 감동적인 재회를 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탐험이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돌아올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돌아갈 본향을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고(히 11:14-16).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삶의 여정가운데 있던지 그 본향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오늘 다시 아직 가보지 않은 내일을 향해서도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6년 4월 26일박일룡 목사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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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
    모든 위대한 도약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모든 위대한 도약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 지난 주 Artemis II 탐사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습니다. 돌아온 우주인들의 이야기들의 이야기는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구를 떠나서 가장 먼 곳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말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겼습니다. 사령관 Reid Wiseman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지구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새롭게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가장 간절히 그리워진 것은 가족과 친구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Christina Koch은 지구를 “어둠 속에 떠 있는 생명선”이라고 표현했고, Jeremy Hansen은 이 여정이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고백을 들으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도전이라 할지라도, 그 시작은 ‘떠남’이라는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떠남은 상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익숙한 자리에서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의 성장은 멈추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새로운 자리로 부르시며, 한 걸음을 내딛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놓기를 원하시는 익숙함은 무엇입니까?편안하지만 변화가 없는 자리일 수도 있고, 익숙하지만 믿음을 제한하는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확실히 보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내딛는 한 걸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그 한 걸음을 내딛어 보시기 바랍니다.익숙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더 깊은 은혜와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떠났기에 잃는 것이 아니라, 떠났기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위대한 도약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2026년 4월 19일박일룡 목사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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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
    사계절을 지나 완성되는 사랑
    사계절을 지나 완성되는 사랑 작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애순과 관식의 사계절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된 사랑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설정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야기이기에 더 깊은 울림을 주는지도 모릅니다.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헌신이 필요하고, 서로를 향한 신뢰가 필요하며, 시간 속에서 선택하고 지켜 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성경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 이야기가 곧 성경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모습은 드라마처럼 아름답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관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사랑은 ‘애순’의 사랑에도 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때로는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며, 신랑 되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우리의 믿음은 연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흠 없고 거룩한 신부로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사랑 이야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며 신부로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사계절을 지나 완성되는 사랑처럼, 우리의 신앙도 때로는 겨울 같고, 때로는 봄처럼 설레며, 여름처럼 뜨겁고, 가을처럼 깊어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아름답게 완성하신다는 사실입니다.그 사랑을 믿고, 그 신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6년 4월 12일박일룡 목사 
    20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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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
    부활의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부활의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장례 예배를 집례해 왔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신 성도님들을 심방하고, 양로병원에 계신 어르신들을 찾아가 기도드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오래전에 보았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듯 보였던 조직폭력배의 행동대장이 사형 집행의 순간,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묻습니다. “나, 떨고 있니?” 죽음만큼 사람을 깊이 아프게 하는 것도, 죽음만큼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단지 생명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지난주 장례 일정으로 Rose Hills Memorial Park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Sky Chapel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 위, 오래전에 마련해 두었던 저희 부부의 묘지 자리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지만, 언젠가는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저도 그곳에 조용히 묻히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시선을 돌리니, 또 다른 언덕에서는 새로운 묘지를 만드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넓은 묘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자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불황이 없는 사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장례사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은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분과 연합된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1) 이 세상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경기는 불안하며, 우리의 육체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는 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부활의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견고한 닻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박일룡 목사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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