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1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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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18개의 글이 있습니다.
  • 52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하며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하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영적으로도 건강한 공동체,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를 향하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고”말합니다(히 10:24).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것이 영적인 케어일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복음 안에서 더 든든하게 세워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도 사랑하고, 자신에게도 좋은 것을 해 줌으로 격려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내가 건강해야 남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셀프케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서로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셀프케어만 잘한다고 공동체가 건강해질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케어할 줄 알아야 하고, 나도 케어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돌보아 주며, 돌봄을 받음으로 공동체가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마음입니다(마 11:29). 우리가 서로 돌보기 위해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gentle and humble)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잘 돌보지 못하는 것도, 부모나 자녀들 잘 돌보지 못하는 것도, 성도나 이웃을 잘 돌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가족 간에 서로 돌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가족같이 여기며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할 때 그 공동체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고, 수적으로도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달 서로 돌아보고 섬기는 귀한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 5월 5일 박일룡 목사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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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지난주 내내 저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오직 그 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1-2)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 땅의 삶가운데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 같은 환경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주는 일도 참 많습니다. 진실보다는 거짓에 사람들은 더 많이 유혹을 받고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낙담하게 만듭니다. 간담이 녹는 것 같은 두려움을, 더 이상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 좌절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담감과 책임이 계속해서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부짖고 소리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을 찾습니다. 분주한 마음으로 주님께 소리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진정 살아 계십니까? 당신은 진정 선하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마도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나의 영혼아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히 여호와만 바라라. 나의 구원은 그에게서 나온다”라고 말입니다.   잠잠히 여호와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미래도, 환경도, 지금의 상황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요새시요, 나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의 고백이 무엇일까요? 계시록은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계 19:6).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어떤 삶의 고난도, 죽음도 흔들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반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노래였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4월 28일 박일룡 목사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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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
    사랑할 만하지 않은 사람도 용납하는 것이 복음적인 삶입니다
    사랑할 만하지 않은 사람도 용납하는 것이 복음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저에게 적용해 보면 저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목사로써 저의 삶은 꾀나 종교적인 일입니다. 새벽기도를 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성경 공부를 준비하고, 심방하고, 교회의 사역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신명기 31장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할 것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가 배신할 것도, 제자들이 도망갈 것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그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셨습니다(요 13:1-5). 그리고 너희들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14-15절).   신앙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당하기 힘든 그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용납하기보다는 가끔씩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바른 소리를 하는 큰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탕자라는 것을 알면 아버지의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불합리하며 불공평하게 느껴져 그 사랑에 도리어 화를 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라”라고 합니다(엡 4:2).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은 때때로 낭비 같아 보입니다. 마음의 낭비, 시간의 낭비, 정성의 낭비, 돈의 낭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제자도의 합당한 삶입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용납하는 삶, 그런 삶이 복음적인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종교적인 인생이 아니라 조금 더 복음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2024년 4월 21일 박일룡 목사 드림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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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
    그리스도 안에서 끝장 난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끝장 난 인생은 없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허탈감으로 삶의 행복을 포기하는 젊은 세대를 빗대어 N포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연애, 결혼, 출산등 3가지를 포기한 3포 세대라는 말에서, 집과 경력도 포기한다고 5포 새대로, 여기에 취미생활과 인간관계도 포기하는 7포 세대, 신체적 건강과 외모를 포함한 9포 세대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실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생에서는 이미 흙수저로 태어났으니 희망이 없다는 청년세대의 박탈감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을 도전해 보기보다는 현실의 벽이 너무 크게 느껴서 이미 ‘끝난 인생’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청년은 아니라도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내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을 만나기도 합니다.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고사하고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을 때도 많습니다. 건강의 걱정도 있고, 경제적인 불안정도 있고, 관계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40세를 불혹의 나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불혹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생의 커리어가 40이 넘어가면 거의 결정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이상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유혹에 덜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끝장난 것 같은 암울한 현실 가운데 있던 예레미야는 다시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삶의 고난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이런 현실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 마음에 소망이 다시 생기게 된 이유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히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애 3:22).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으니 그것이라고 붙들고 위안을 삼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진멸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중에 남은 자를 두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남은 자를 두시고 그 남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한 우리의 인생은 끝장 난 인생이 아닙니다. 끝장난 인생 같은 나의 삶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알 때 오늘 하루도 새로운 은혜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끝장난 인생”이 없습니다.   2024년 4월 14일 박일룡 목사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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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
    머리와 연결된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머리와 연결된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오랜 전의 일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지도하던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프리웨이에서 사고가 났는데 함께 탔던 친구들은 다행히 큰 부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의식이 없어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고 의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얼굴에만 조금 상처가 있을 뿐 겉으로 보기에는 큰 외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몇 번의 수술을 해야 했고, 수개월 입원을 하고 치료를 했지만 결과는 하반신 마비였습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는데 부모님도 꽤 힘들어하셨고 이 학생도 많이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이제는 회복하여 재활 훈련을 하고 손으로 운전하는 차도 구입하게 되어서 직접 차를 타고 학교를 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하반신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멀쩡한데 머리와 신경으로 연결되지 않으니 몸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머리와 몸이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동일한 비유를 가지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머리와 연결되어 있어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권면합니다 (엡 4:16).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하고,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와 연결은 필수적입니다. 서로 하나 되기 위해서도 머리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머리와 몸이 있지만 머리의 지시대로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끔찍한 장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몸은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머리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 없이 몸만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공포 영화의 한 장면같이 무서운 일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교회도 문제이지만, 아예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더 큰 문제입니다.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성도가 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이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일 것입니다.   2024년 4월 7일 아침 박일룡 목사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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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7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신학적인 이해, 예배 방식과 전통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십자가입니다. 성당에 가도 십자가가 있고 교회에 가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십자가에 예수님의 형상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형상은 없고 십자가만 있습니다.   천주교 십자가에 예수님의 형상이 달려 있는 것은 천주교의 예배의식에 대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예배를 보통 ‘미사’라고 합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의 재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마지막 만찬의 재현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도 실제 예수님의 피와 살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제단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두고 그 살과 피에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며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예배를 드리는 곳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하면서 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계신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은 만왕의 왕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함께 부활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내어 주셨다는 사실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믿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희생과 섬김의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습니다(히 2:1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이제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도 담대히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주님 달려 계신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이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십자가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나무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여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024년 3월 31일 박일룡 목사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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