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10 페이지


  • Rohthem Ma-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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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18개의 글이 있습니다.
  • 64
    우리도 죽을 날이 오겠지요?
    우리도 죽을 날이 오겠지요?   “목사님, 우리도 죽을 날이 오겠지요?”   4년 전 사별하신 남편을 그리워하며 이야기하시던 어떤 권사님이 저에게 불쑥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지난달은 유독 죽음이라는 주제가 가까이 다가왔던 시간이었습니다. 제 아내의 대학교 후배인 자매가 오랜 항암치료 끝에 결국은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 5명을 두고요. 참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직 한 참인 50대 초반의 아들을 먼저 보낸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것도 이번이 두 번째의 일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요. 그 권사님을 심방하면서 함께 위로하기 위해 참여하신 권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른 권사님은 20대의 젊은 딸을 먼저 보내고 너무 힘들었던 옛날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떻게 견디셨는지.   그리고 지난주는 오랜만에 신학교 선배, 동료 목사님과 부부 동반으로 만나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배 목사님이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는데 그 딸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해했던 캠핑장, 바로 그 사이트에 예약을 해서 지난여름 온 가족들이 캠핑을 다녀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 딸은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아이였고, 그가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리고 부모로 두 분이 이 딸로 인한 고통과 눈물을 너무나 잘 알기에 두 분은 담담하게 이야기하셨는데 돌아오는 길에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모릅니다.   저보다 어린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며 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면서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마도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후의 미래까지 준비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많은 죽음을 접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중에 생각난 찬송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 가리”   이렇게 오늘도 찬송하며 걸어가자고, 그리고 주님 부르실 때 후회 없이 주께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자고 스스로를 다시 다짐해 봅니다.   2024년 8월 4일 박일룡 목사
    20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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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
    우리의 섬김, 그들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
    우리의 섬김, 그들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 2024년 아마존 삼국경 신학교 목회자 세미나를 섬기기 위해서 단기팀이 이번 주 목요일 출발합니다. 목요일 오후 3시경에 출발하면 금요일 오전 9시 16분에 현지 공항에 도착합니다. 휴스턴에서 3시간 반 경유하고, 다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공항에서 2시간 반을 경유해야 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9일 금요일 오후 12시에 레티시아 공항을 출발하여 에는 보고타에서 10시간을 경유하고, 휴스턴 공항을 거쳐 LAX로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밤을 비행기에서 보내야 하고 두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야 합니다. 현지의 더위와 벌레도 이겨야 합니다.  이번 단기팀은 이번에 17차로 이어지는 삼국경지역 목회자 세미나를 섬깁니다. 저는 저희가 방문하는 마을 교회 설교 3번, 세미나 개회 예배 설교와 세 번의 강의로 총 7번의 말씀으로 지역 목회자와 현지 교회 성도들을 섬길 예정입니다. 팀들은 복음전도 세미나(안임숙전도사), 신앙간증(최붕섭장로), 의료위생 세미나(인문희권사/송영애권사), 치과 사역(최은숙집사), 플러밍 사역(홍익화목사)을 맡아 진행합니다.  그 외에도 마을 교회 방문해서는 가족사진 사역도 하고, 세미나 기간 동안 오후 특별활동과 공동체 게임도 진행합니다. 세미나 참석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점심 저녁 식당 셋업, 봉사, 설거지 등도 섬깁니다. 목요일은 점심은 저희 팀이 직접 요리한 닭도리탕을 만들어 150여명 되는 참석자 전원을 대접할 예정입니다.  더운 날씨에 수고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복음으로 아마존 지역의 목회자들이 든든히 설 수 있도록, 세미나와 특별활동을 통해서 공동체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도록, 그리고 저희의 섬김을 통해서 그곳의 지도자들이 섬김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영혼은 전하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귀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마존의 인디오 부족들의 영혼도 동일하게 귀히 여기실 것이 분명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내는 사람이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합심해서 바자회를 하고, 특별 헌금을 하시고, 또 기도로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힘있게 말씀을 증거하도록 기도부탁 드립니다. 건강하게 사역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섬기게 하시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그들의 교회가 든든하게 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7월 28일 박일룡 목사  
    20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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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
    하나님은 자원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모든 남자들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강제로 군대에 가는 것은 결코 기쁜 경험이 아닙니다. 그래서 병역을 피한 사람들에게 대한 상대적인 적대감도 있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모병제로 군대를 운영합니다. 자원하여 입대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일정의 봉급과 함께 여러 가지 베네핏도 제공합니다. 또한 자원하여 입대하여 나라를 지키기 때문에 군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지지가 상당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아무리 좋은 베네핏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하는 일을 고된 일이라고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했습니다. 성벽만 만든다고 도시가 재건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람들이 살아야 도시의 기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토화된 성 안에 살고자 하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세 그룹의 사람들을 강제로 성내로 이주시킵니다.   먼저, 지도자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안에 살게 했고, 다음으로는 제비를 뽑아서 10분의 1의 백성들은 성안으로 이주하여 살게 했습니다(느 11:1).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느 11:2). 이들은 지도자도 아닙니다. 뽑힌 자도 아닙니다. 일부러 불편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을 재건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원하여 성 안에 들어가서 삶으로 예루살렘 성이 다시 재건되는 일에 헌신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서 온 백성이 복을 빌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을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원하여 섬기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고후 9:7).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하지 않아도 되는 헌신을 하는 자들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리더들이 마땅히 목양을 해야 합니다.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억지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리더들에게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목양하라고 합니다(벧전 5:2). 그런 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라고 격려합니다(4절).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섬기고 있습니까? 억지로도 섬기지 않으면서 혹 뒤에서 불평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섬기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7월 21일 박일룡 목사
    202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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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
    선교는 마땅히 해야 하는 책무입니다
    선교는 마땅히 해야 하는 책무입니다   채무자(債務者)란 “채권자에게 급부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법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급부’란 갚은 의무를 말합니다. 그래서 갚지 않을 때에는 강제로 수입이나 재산을 압류할 수 있습니다. 빚을 진다는 것은 그런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은행의 채무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빌린 빚을 제 때 갚지 못하고 있을 때 마음의 부담이 상당합니다. 남의 돈을 빌려 쓰고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돈을 갚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기 쓸 것을 아껴가면서, 일자리를 하나 더 가지더라도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빚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특히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교회 성도들이 드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를 이방인들의 특별한 호의가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 것으로 표현합니다(롬 15:26, 27).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받았기 때문에 물질로 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이 받은 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말합니다(눅 12:48). 우리가 받아서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자기 것을 가지고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은 빚을 갚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이지 마치 우리의 호의나 선심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모든 일을 다 하고 난 후에도 우리는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할 것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또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고 표현합니다(롬 1:14). 바울은 성도들이 드린 연보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려고 합니다. 또 믿지 않는 그의 동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기꺼이 여행하여 찾아갑니다. 그 일을 끝마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면서 말입니다(행 20:24).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기꺼이 감당하는 것, 그것이 선교입니다.   2024년 7월 14일 박일룡 목사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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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
    성도로 불리며 성도로 사는 자가 되기를
    성도로 불리며 성도로 사는 자가 되기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이름들이 성경에 여럿이 있습니다.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이 말은 ‘회중’, ‘불러 내어 모은 무리들’이란 뜻입니다. 세상에서 부름 받아 하나님 앞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란 단어도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창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제자”로 불렸습니다(행 6:1, 7; 9:1, 19). 12명은 따로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제자라고 불린 것을 불 수 있습니다(행 6:1, 7; 9:1, 19, etc.).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고 말합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 ‘그리스도의 도당들’, ‘그리스도파들’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과 구별되는 새로운 그룹이 생겼기 때문에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등에 편지를 보낼 때 편지의 수신자를 교회 또는 성도라고 흔히 불렀습니다. 성도는 ‘거룩한 자들’(holy ones)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성도라고 하는 이름이 사용될 때는 성도라고 “불리는 자들”이라고 합니다(고전 1:2). 즉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우리의 거룩한 행실이나 노력 이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자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성도란 이름이 얼마나 좋은 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무리들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교회는 본질상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구별된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안에 거룩하신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도’가 없습니다. 대부분이 집사이고, 권사입니다. 장로이며 목사입니다. 아마도 어떤 목사님을 성도로 소개했다면 굉장히 기분이 나빠하는 분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서 성도는 예수를 갓 믿은 분들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귀한 이름 성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로 불림받은 것을 감사하고, 성도로 살다가, 성도로 주님 품에 안기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성도’가 되기보다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제 삶을 돌아보면서 좀 더 성도다운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24년 7월 7일 박일룡 목사
    202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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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9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선택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선택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일로 수감되었다가,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그는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언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삶도, 돈도 명예도, 고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일보다 더 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아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왕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며 재판정에 앉아 있는 아그립바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당당했습니다. 부러운데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는 권세와 영광, 부요함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입니다(엡 1:17-19).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내가 이렇게 묶여 있는 것 외에는 당신이 나처럼 되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때까지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버린 것이지 아깝지만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빌 3:7-9).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 대론 ‘헌신 신드롬’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 삶을 포기하고 이 정도 헌신하였으니 나를 좀 알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 없을 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향한 헌신은 나를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위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위한 헌신은 더 좋은 것, 더 고상한 것을 발견한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여전히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의 삶이 아름답고, 당당할 것입니다.   2024년 6월 30일 박일룡 목사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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